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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BEE)

벌의 천적

벌의 천적

벌의 세계는 평화롭지 않다

꽃과 벌은 한편의 풍경처럼 보이지만, 벌의 일생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 배경은 늘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채집을 위해 비행하는 순간에도 공중의 적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꽃에서 꿀을 빠는 짧은 몇 초 사이에도 매복한 포식자가 반 발 앞에서 기다린다. 벌집으로 돌아오면 안심일까?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생충과 병원체는 벌의 체내를 갉아먹고, 더 넓은 차원에서는 농약과 서식지 파괴, 기후 변화가 벌의 생존 조건을 조용히 바꿔 놓는다. 그럼에도 벌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까닭은, 오랜 세월 다듬어진 사회성·방어 행동·집단 지능이 치열한 압력 속에서도 균형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이 장은 그 균형을 깨뜨리는 힘들—천적과 적—을 서술하고, 벌이 이를 어떻게 학습하고 대응하는지, 그리고 최근 연구가 어떤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지까지 이어서 살핀다.


벌의 천적

1. 공중의 포식자: 새들의 그림자

하늘 위에서 벌을 기다리는 적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존재는 이름 그대로 벌을 먹이로 삼는 꿀벌잡이새다. 이 새는 단순히 날아다니는 벌을 낚아채는 데 그치지 않고, 나뭇가지나 바위에 벌을 툭툭 부딪쳐 독침과 독주머니를 제거한 뒤 삼킨다. 벌이 독침을 갖고 있음에도 조류 앞에서 무력해지는 장면은, 자연 선택이 만든 무기의 성능이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제비·참새처럼 벌을 전문 사냥감으로 삼지 않는 조류도 먹이 사정이 나쁘거나 번식기의 에너지 수요가 커질 때는 벌을 적극적으로 포획한다. 꽃이 무성한 계절, 채집벌의 이동 경로가 새들의 사냥 루트와 겹치면 공중전은 더 잦아진다. 벌 입장에선 하늘이 곧 통로인 동시에 전장인 셈이다.


2. 곤충 천적: 말벌과 사마귀의 위협

곤충 세계의 천적은 벌에게 더욱 즉각적이고 잔혹하다. 말벌은 체격과 악력, 턱의 절단력에서 꿀벌을 압도하며, 정찰—표적 지정—집단 공격의 단계적 전술을 구사한다. 소수의 말벌이 접근했을 때 꿀벌이 구사하는 집단 ‘열공격’은 놀랍도록 정교하다. 수십 마리가 포식자를 둘러싸 비행근을 떨며 열을 올려 말벌의 임계 체온을 넘긴다. 하지만 공격대가 수십 마리로 늘어나면 방정식이 바뀐다. 공격·수비의 전선이 벌집 입구에서 내부로 밀려들어가고, 방어 인력 배치와 꿀·유충 방어 우선순위가 충돌한다. 이때 벌은 출입구를 좁히고 경비벌을 집중배치하며, 내부에서는 트렘블댄스류의 혼잡 신호가 증가해 채집·가공·경계의 균형을 재조정한다.
사마귀는 ‘기술’이 아닌 ‘타이밍’으로 승부한다. 꽃 위나 줄기에서 색과 자세로 자신을 숨긴 채, 꿀을 빠는 순간의 느슨해진 경계를 파고든다. 한번 앞다리에 포획되면 탈출 확률은 급격히 떨어진다. 꽃거미처럼 위장에 능한 포식자와 거미줄 매복자는 ‘꽃=자원’이라는 벌의 확고한 학습을 교묘히 이용한다. 벌에게 꽃은 먹이이자 매복지, 곧 기회이자 위험이다. 그래서 현장 벌들은 향기와 색뿐 아니라 표면 질감·착지 안정성·주변 진동까지 통합해 빠르게 위험을 스캔한다.


3. 포유류의 습격: 곰과 오소리의 힘

포유류는 벌을 한 마리씩 잡아먹지 않는다. 이들의 전술은 ‘시설 파괴’에 가깝다. 곰은 두꺼운 털과 피부로 쏘임 피해를 흡수한 채, 발톱으로 벌집을 찢고 내부의 꿀·화분·번데기를 한 번에 노린다. 벌집 물류의 심장부가 무너지면 군체는 단기간에 회복 불가능한 충격을 받는다. 아프리카·중동의 꿀오소리는 집요함과 내구성으로 이름이 높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쏘임을 감내하면서도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이 포식자는 ‘비용을 기꺼이 치르는’ 유형으로, 벌에게는 단발의 전투가 아닌 ‘버티기의 전쟁’을 강요한다. 양봉가들이 전기 울타리·내구성 높은 벌통·입구 협폭화 같은 방어 인프라를 고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보이지 않는 적: 기생충과 병원체

가시적 포식자가 떼를 지어온다 해도 벌은 때로 극적인 집단 전술로 저항한다. 그러나 현장에서 가장 꾸준하고 치명적인 피해를 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적, 곧 기생충과 병원체다. 응애는 벌의 체액을 빨아먹어 직접적 손상을 줄 뿐 아니라, 날개변형바이러스 같은 병원체의 효율적인 택배 역할을 한다. 응애 감염군에서는 비행 능력을 상실한 개체가 늘어나고, 귀소 성공률이 떨어져 채집-가공-유충급이의 생산 사슬이 중간부터 끊어진다. 노제마병처럼 소화기관을 노리는 병원체는 조용하지만 집요하다. 개체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수명을 단축시켜, 결국 같은 크기의 군체가 유지되어도 ‘실질 노동력’이 빠르게 감소한다. 군체는 위생행동으로 오염된 번데기를 제거하고, 프로폴리스로 항균성 미세환경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병원체가 응애에 실려 폭발적으로 퍼질 때는 방어의 속도가 감염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보이지 않는 적의 본질은, 겉으로 보이는 생산성 하락이 이미 내상(內傷)이 깊어진 뒤에야 표면화된다는 점이다.


5. 인간과 환경: 가장 근본적인 위협

자연의 포식자는 벌을 단번에 무너뜨리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낸 복합 스트레스는 벌에게 ‘만성 피로’와 같은 상시 손실을 안긴다. 네오니코티노이드계 살충제를 비롯한 일부 농약은 벌의 신경계에 작용해 방향 감각과 학습·기억을 흐리게 한다. 채집벌은 꿀을 물고 집을 향해 비행하지만, 미묘하게 틀어진 방향 감각은 ‘귀소 실패’라는 소모적인 오차로 기록된다. 서식지 파괴는 계절 내내 다양한 꽃이 이어지는 경관을 모노컬처의 단조로움으로 바꾸어, 벌에게 연쇄적인 ‘비수기’를 만든다. 기후 변화는 꽃의 개화 타이밍과 벌의 생리적 주기를 불협화음으로 만든다. 다년간의 평균이 흔들리면, 벌이 믿어온 ‘계절 신뢰도’도 함께 흔들린다. 자연의 포식자와 달리 인간 요인은 방향성이 있고, 넓게, 깊게, 오래 지속된다. 그래서 관리·정책·기술의 협공 없이 현장에서의 적응만으로는 균형을 되찾기 어렵다.


6. 벌의 방어 전략: 집단 지성의 힘

그럼에도 벌은 무릎 꿇지 않는다. 경비벌은 입구에서 후각으로 동족 여부를 감별하고, 이질적인 냄새가 감지되면 경고 페로몬으로 주변의 반응역치를 낮춘다. 순간적으로 ‘전투에 적합한 심리 상태’를 집단적으로 만든 뒤, 필요한 곳에 병력을 밀어 넣는다. 외부 위험이 누적되면 입구를 좁혀 소수의 방어선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내도록 구조를 재설계한다. 더운 날에는 물을 운반해 벽에 바르고, 일제 선풍(fanning)으로 증발 냉각을 일으켜 유충 구역의 온습도를 정밀하게 유지한다. 이 모든 과정은 지휘관의 명령이 아니라, 간단한 규칙의 상호작용—스티그머지—로 조직된다. 한 개체가 남긴 흔적이 다음 개체의 행동을 유도하고, 그 반복이 전체 구조와 리듬을 만들어낸다. 사회적 면역도 마찬가지다. 위생행동으로 오염된 번데기를 신속히 제거하고, 상호 그루밍으로 외부 기생체를 털어내며, 프로폴리스로 틈새 환경을 항균적으로 만든다. 집단은 각 개인의 작은 행동이 내는 소음을 평균해, 놀랄 만큼 정밀한 ‘전체의 해답’을 산출한다.


7. 최신 연구 동향: 현장에서 작동하는 해법을 찾아

응애와 병원체 관리의 진화
현장 양봉은 양분화되어 간다. 한편에선 **통합적 응애 관리(IMM)**가 표준으로 자리 잡는다. 계절별 응애 개체군의 동태를 모니터링하고, 드론 번데기 제거(응애 선호 숙주 차단), 바닥 망판·분리 교체(낙하 응애 재부착 차단), 산(옥살릭·포름산)·식물성 정유(티몰) 기반의 저잔류 처방을 상황에 따라 교차 적용한다. 약제 의존을 줄이는 대신, 처리 시기·온도·군체 크기를 미세 조정해 ‘효과와 스트레스’의 균형을 맞춘다. 다른 한편에선 유전육종이 속도를 낸다. 위생행동이 탁월해 오염된 번데기를 높은 비율로 제거하는 계통(VSH, hygienic lines), 응애 번식 억제 특성을 지닌 계통(SMR)이 실증 양봉에 투입된다. 과거엔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우려가 컸지만, 최근에는 벌의 체력·꿀 생산성과 병충 저항성을 함께 유지하려는 다목표 선택이 정교해지고 있다. 마이크로바이옴(장내 미생물 군집)을 개선하는 프로바이오틱스 접근도 증가한다. 장내 균형을 통해 병원체 감수성을 낮추고, 영양 흡수를 돕는 방향이다. 실험실 수준에 머물던 RNA 간섭(RNAi) 기반의 바이러스 억제, 응애 표적 유전자 침묵화 전략도 현장 적용성을 높이기 위해 전달 경로·안정성을 개선하는 연구가 이어진다. 핵심은, ‘하나의 은탄환’이 아니라 여러 약한 해법의 조합이 강한 방패가 된다는 점이다.

말벌·포식자 대응의 지능화
아시아말벌 확산 지역에선 스마트 트래핑과 둥지 탐지가 결합된다. 향기 유혹 트랩은 비표적 곤충 피해를 줄이도록 구성이 개선되고, 소형 전자태그를 부착한 개체를 추적해 둥지를 역추적하는 방식이 드물지 않게 쓰인다. 드론·열화상으로 숲 가장자리와 인가 주변의 둥지 의심 지점을 빠르게 스캔하는 사례도 늘었다. 벌집 측에서는 입구 협폭화·격자 가드로 말벌의 일시 침입을 어렵게 하고, 벌통 전면에 시각적 혼란 패턴(격자, 스트라이프)을 부착해 포식자의 착지·정렬을 방해하는 장치가 시험된다. 종(種) 고유의 행동 차이를 존중하는 접근도 눈에 띈다. 일본 재래꿀벌의 집단 열공격+소리 진동 혼합 전술을 서양종 관리에 참고해, 현장 방어 역치를 낮추지 않으면서도 과잉 공격으로 인한 소모를 줄이는 ‘조건부 방어’ 프로토콜이 제안된다.

농약·경관·정책: 필드 밖에서의 전쟁
농약을 둘러싼 해법은 ‘줄이거나 바꾸거나 피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첫째, 살충제 사용량·살포 시점·제형을 조정해 개화기 노출을 최소화한다. 둘째, 상대적으로 벌에 덜 치명적인 대체 약제·생물농약을 늘려 ‘독성 포트폴리오’를 바꾼다. 셋째, 농장 경관 차원에서 화분·꿀 자원 회복을 시도한다. 논두렁·밭두렁·농로·과수원 경계에 꽃 띠를 조성해 ‘허기 구간’을 줄이고, 단일 작물 지대에 다양성의 틈을 만든다. 정책 측면에선 지역·국가 단위로 개화기 살포 금지 창구를 분명히 하고, 양봉·과수·노지채소 농가가 공동 캘린더로 약제 살포 시기를 맞추는 협업 모델이 늘어난다. 연구는 규제와 현장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실험실에서 안전—현장에서 유효’라는 이중 기준을 통과한 처방만을 권고 리스트로 묶는 추세다.

정밀 양봉(Precision Apiculture)
센서·AI·통신의 결합은 벌에게 ‘얼마나’가 아니라 ‘언제·어디서·왜’를 알려주는 도구가 된다. 벌통 내부의 온·습도·CO₂·진동 패턴, 채집 벌의 출입 빈도, 밤 시간대의 미세한 소음 변화를 통합 분석하면 응애 급증, 여왕 문제, 포식자 위협의 조짐을 며칠 먼저 포착할 수 있다. 말벌 접근의 특이한 음향 서명, 응애 스트레스가 높을 때 나타나는 선풍 패턴의 변화, 여왕 부재 시 진동 스펙트럼의 변형 등은 자동 경보로 전환된다. 현장은 ‘발생 후 대응’에서 ‘발생 직전 개입’으로 이동하고, 개입의 강도는 더 낮아지지만 시점은 더 정교해진다. 데이터는 결국 벌의 언어를 번역하는 사전이며, 사전이 두꺼워질수록 개입은 짧고 가늘어도 충분해진다.

유전·생태의 접점: ‘강한 벌’이 아닌 ‘맞는 벌’
단단한 한 계통을 어디에나 보급하는 전략은 환경 다양성 앞에서 취약하다. 최근 경향은 지역 꽃차례·기후·포식자 압력에 맞는 계통의 조합을 찾는 쪽으로 기운다. 위생성·온습도 조절 민첩성·저온 내성·고온 내성·포식자 회피 민감도처럼 형질들을 묶음으로 보고, 지역별로 다른 ‘최적 묶음’을 설계한다. 그 과정에서 야생·재래 계통이 지닌 소중한 형질(예: 특정 병원체 저항성, 열파 내성)이 재해석되고, 양봉 현장과 보전 생태가 경쟁이 아닌 상호 보완로 이어진다.


적과의 투쟁, 그리고 인간의 책임

천적은 벌에게 시련이지만 동시에 학습의 교과서였다. 말벌의 공세는 집단 열공격과 경계 행동을 정교하게 만들었고, 기생충과 병원체는 위생행동과 사회적 면역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복합 스트레스는 학습의 속도로는 따라잡기 어려운 규모와 속도로 다가온다. 그래서 최신 연구는 벌에게 새로운 무기를 쥐여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경관·농업 관행·정책·데이터를 함께 바꾸려 한다. 적을 몰아내는 일만큼이나, 벌이 숨 쉴 공간과 시간을 돌려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이다. 결국 벌의 생존은 곧 우리 식탁과 생태계의 회복력으로 돌아온다. 적을 이해하고, 맞춤형 방어를 설계하며, 현장과 연구·정책이 한 호흡으로 움직일 때—벌은 다시 균형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그 균형이 유지되는 한, 사람과 벌이 함께 누리는 풍경은 오래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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